내가 한국 사회에서 정의하는 "명문대생" 중 하나임을 자각하고 놀랄 때가 있다.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에 특히 그렇다. 도무지 머리를 쥐어짜도 집중을 못 하겠고, 거의 울다시피 하며 장문의 entry를 억지로 독해해 나가는 그런 날.

스스로 공부를 잘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중학생 때까지만 하더라도 자존심이 강했던 것 같은데 특목고에 진학한 뒤로는 태생적 한계에 절망하기만 하다가 슬슬 지쳐서 대강 상위권에 속한다는 사실에 안주하기로 타협함. 회고하자면 초등학생 때도 수학을 못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내게 남들보다 한참 '후달리는' 분야가 있음을 일찌감치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내가 천재일 수도 있다는 허황된 희망을 가진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 동기인 H양이 (아니, 이번에도 이니셜이 H네.) 몇 달 전에 그런 말을 했다. "이상하네, 내가 아는 K는 천재가 아니어서 슬프다고 그랬는데."

그러니까 작년을 기점으로 나는 내가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하거나 억울해하기를 관두었다. 다만 공부 효율이 기대에 미치지 않아 초조해지거나 갑갑할 때가 종종 있다. 인생은 길다지만 당장 주어진 과제는 마감 기한까지 채 하루도 남지 않았고, 내 눈알은 좀처럼 빠르게 굴러가질 못하고, 인위적으로 독서 속도를 높여보려 해도 아무런 정보도 머리에 입력되지 않는 상황이 오면, 안 그래도 병리적인 불안에 시달리는 만큼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결국 어느 지경까지 왔냐면. 유튜브로 속독법 찾아보기. 왜 영상을 찾아 보냐면 오늘치 시각은 다 쓴 것 같아서. 글은 못 읽겠고 음향만 들어야겠음.

난 주변에 공부하는 사람 중에서 나보다 글을 느리게 읽는 사람을 못 봤다.

이건 참 희한한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미국에서 여름 방학 동안 속독 캠프에도 참여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모양이라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 만일 독서량/학구열과 독서 속도 간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그래프를 그린다면 나는 의심의 여지 없이 아웃라이어로 처리될 것이다.

단순히 조금 느리게 읽는 게 문제라면 꼼꼼히 읽는 편인가보다, 하겠는데 수능 국어에서도 늘 시간에 쫓기며 간신히 1등급을 받았다는 걸 상기하면 좀 큰일인 것 같음(참고로 수능 영어에서도 시간이 안 남았다). 느리게 읽는데 내용 파악도 잘 못한다니... 전문적으로 철학을 공부하기에는 심각한 수준의 악조건이 아닌가...

읽는 속도가 느리니까 중요한 글만 선별해 읽는 식으로 어찌저찌 버티는 중이었는데 이젠 진짜 안 될 것 같음. 읽어야 될 게 너무 많음. 큰일났음.

아니 그래서 다시 "명문대생" 이야기를 하자면, 무슨무슨 명문대생 공부법 같은 게 판을 치는 세상에서 나는 대체 어떻게 공부하는지 자문해봤는데, 진심으로 모르겠다. 공부는 어떻게 하는 걸까?

이번 학기 중간 시험에서 압도적으로 1등을 한 수업은 시험범위가 총 4개 챕터였다. 전날 점심부터 부랴부랴 벼락치기를 시작해서 첫 챕터를 손글씨로 정리하다가 시간에 쫓겨 두 번째 챕터는 노션으로 정리했다. 그것마저 너무 오래 걸려서 세 번째 챕터는 갤탭으로 PPT 파일 위에 필기했고, 네 번째 챕터는 뭘 쓸 시간도 없어서 여러 번 읽기만 했다. 네 번 다 다른 방식으로 공부했던 탓에 대체 뭐가 정답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아니, 중간고사를 이렇게 정신 사납게 공부했으면 기말고사는 어떻게 공부해야 맞는 걸까? 벌써 4학년 1학기인데 아직도 나한테 맞는 공부법을 모른다. 이러다 죽을 때까지 헤매고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