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Professor
- 그레이버는 행위를 중심으로 가치를 재정의하려 함
- cf. 90년대의 소위 “practical turn”
- 2장: 1980년대, 맑스주의 이후
- 맑스주의 인류학에 대한 2가지 반응으로 포스트구조주의와 신모스주의 제시
- 부르디외에 대해 한편으로는 가혹하고, 한편으로는 수긍할 만한 내용 제시
- 구조주의와 현상학을 어떻게 매개할 것인가? → practice & habitus (아비투스는 “구조화시키는 구조”)
- 부르디외의 장이론 갈수록 형식론적인 모습 갖추게 됨
- 아파두라이 - 소비의 창조성, 교환의 우선성
- 스트래선 - 기존 구조주의적 가치개념과 멀지 않은 논의 반복
- 낸시 문 - 가치의 원천으로서의 행위 (상호주관적 시공간에서의 영향력과 능력으로 재해석)
- “준다”는 행위에 초점 맞춤
- cf. 124쪽 (나는 이 장에서 가치 이론이~)
- 3장: 철학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논점 정교화
- “사회”, “행위자”, “행위성” …
- 본인의 구조주의는 피아제의 구조주의에 가깝다고 설명
- 50-60년대 구조주의 혁명 때 피아제의 구조와 레비-스트로스/소쉬르의 구조 충돌 (쟁점: 후자의 구조는 일순간 등장.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것 아님, 잠재적인 것으로만 존재. 전자의 구조는 발달해 감.)
- 그레이버의 기획: 노동가치론에서 (맑스적) 노동을 행위로 바꿔보기
- 사회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노동시간 ← 재규정하여 행위가치론으로 만들어보기
- virtual한 것에서 actual한 것으로 행위 바꾸기
- 행위를 중심으로 가치를 논의하면 사회-개인, 구조-주체의 문제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한편으로는 주체의 행위를 창조적인 것으로 재규정; praxiological)
- 맑스의 포이에시스는 구조를 재생산하는 행위. 프락시스는 구조 자체를 바꿀 수 있는 행위. 재생산과 생산이라는 이분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 맑스 - 노동은 생산물뿐아니라 사회 및 노동하는 주체 스스로를 만들어낸다
- cf. 180쪽 (사회는 결코 어떤 대상이 아니며~) - 가치로 변화되느냐(actualize) 그렇지 않느냐
- 맑스의 가치개념은 리카도의 가치개념과 다름 (리카도에게 가치란 이미 그 생산물에 들어가 있는 것. 맑스에게 가치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은 형태에서 사후적으로 재확인되는 것.) ← 가라타니 고진 등이 지적한 맑스의 시간적 패러독스
- 관객이라는 비유 사용 (← 일종의 퍼포먼스?)
Discussion
- Q. 내가 말할 때 상대방이 경청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일 때, 이것은 나에게 승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도 교환인가?
- A. 그레이버는 교환과 순환을 구별함. 이 경우에는 순환일 듯?
- Q. cf. 137-8쪽 - 몸이 있기 때문에 물질적?
- A. 비/물질적인 것의 구분 없앰 (ex. 교회) / 행위, 효과, 힘 측면에서 비/물질적인 것을 모두 묶어 이해할 수 있음
- Pf. material turn - 물질성을 힘 혹은 효과로 이해하기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보다는 어떤 실질적 효과를 일으키는가에 초점 맞춤)
- transactional reality (action을 통해 만들어지는 reality → action 자체에 힘을 가지게 됨 (예: 국가))
- 맑스의 논의에 몸은 들어갈 여지가 없다
-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materiality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 “Thingness”로 구별하기도
- 예: 음식이 썩고, 사물이 만져지고… 하는 것들은 thingness
- cf. Munn이 “qualisign”이라고 부르는 것 (cf. Peirce)
- 그레이버는 기계적 유물론과 맑스주의적 유물론 구분하려 함
- 물질/상징의 구분 없애거나 둘을 연결시키려고 시도 (Munn과 함께)
- 현실을 만들어내는 rituality (인류학에서의 상징): 암호화폐 앞에서 가즈아를 외치는 (ㅋㅋㅋㅋ) “계엄을 선포합니다” 이런 말의 효과
- 상징(말의 힘)을 어떻게 지칭할 것인가 → performativity
- cf. <숲은 생각한다>에서 비인간 행위자의 행위성을 어떻게 설명하나요?
- → 표상작용을 한다 (전체 상징체계… 상징이라는 표현은 쓰면 안 되겠죠 그건 퍼스니까 아무튼 전체 체계 내에서 표상작용이 의미를 가지는) ↔ 사물성 (과속방지턱이 행위성을 가지는 이유는 그것의 물질성 때문이고)
- cf. 라투르는 에두아르도 콘식의 행위성에 반대하죠 그러면 다시 상징작용에 대한 세계로 돌아간다고
- Q. 그레이버가 지나치게 생산에 방점을 찍는 것 같다?
- 그레이버의 핵심: 가치가 뭐냐고 질문하지 말기… 어떻게 가치가 생산되는지를 보기… (가치가 무엇인지 정의하려는 탐구들이 어떻게 망했는지를 보여줌… 행위와 실천을 보기…)
- Pf. 우리가 정말 궁금한 지점은 어떻게 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지가 아닌가? (만일 그레이버의 말마따나 행위자가 일종의 관객들로 대변되는 사회 앞에서 성공적으로 perform할 때 가치가 사후적으로 인정받는다고 한다면?)
- 아파두라이는 tournament의 비유 사용. 맑스는 왜 어떤 구체노동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지를 설명. 그런데 그레이버는 가치가 인정받는 매커니즘 논하지 않음.
- 맑스를 가치에 대한 사회구성론자로 볼 수 있는가? (한편으로는 맞죠)
- 모스나 폴라니와는 다른 점은 그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된 상태라는 것
- 그런데 그레이버에게서 그런 문제의식은 없음 (사회를 단일한 것으로 간주. 적대나 배제의 문제 나타나지 않음) ← 바로 이 이유로 그레이버가 모스와 맑스를 합치려고 할 수 있는 것 (그레이버를 다 읽고 나면 맑스는 어디 갔지 싶어요)
- 맑스의 노동 개념을 그렇게 쉽게 행위로 바꿀 수 있는가(계급 간 적대 개념 사라짐)? 맑스에게 적대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문제(사회 자체가 그렇게 생겨져 있기 때문에). 그레이버는 그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파악.
- cf. 고등학교 사회문화 - 기능론(뒤르켐 등) 대 갈등론(맑스)
- Pf. 맑스가 갈등론자일까? 사회가 계급 간 구조 속에서 변화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푸코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인용하듯 그 이전에도 블랑비리에(?) 등 유사한 주장을 한 학자들 있었다) 맑스는 “사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게 아닐까? 사회가 계급으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다는 주장과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라는 관념이 일종의 계급적 분할을 가로지르며 존재한다는 주장은 다르다. (미국 사회학자 중 굴드너 같은 사람은 맑스를 갈등론자로 본다)
- 그레이버는 인간 행위자만을 논하는데, 비인간 행위자나 장치의 행위성도 논할 수 있을 것 (행위를 힘과 효과의 문제로 본다면)
- cf. 칼롱 - 가치화 장치들을 중심으로 그레이버의 문제의식에 일정 부분 동의하되(정태적, 주관적 가치 개념에 반대) 장치들의 행위성 강조
- ‘빚’ (=값. 비싸다=값지다 등) → 본래 의미가 탈각되고 부채로서의 의미만 갖게 됨
- 한국어에서는 debt가 credit이 아니라 value와 붙어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빚을 진다는 것이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 의미도 갖고 있었다는 함의?)
- 빚을 질 수 있는 능력이 자산을 형성한다고 하는 것만 봐도 현재까지도 유통되고 있는 관념인 것 같다.
- 어떨 때 빚이 pride나 shame이 되는지?
- 이자율로 책정되는 가치(화)? (신용등급에 따라 대출한도나 이자율 변경)
- 그레이버의 또 다른 주저는 <부채> (*절판된 번역본이 이상하니 원서 보세요)
- 한국어에는 credit에 대응하는 단어가 없는데, 누군가에게 credit을 주는 것(인정하는 것)은 그에게 빚을 지우는 것이기도.
- valuation 장치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credit을 측정하는 것 (미국 credit 측정에 대한 역사적, 인류학적 연구 존재)
- 한국에서도 이 알고리즘이 원칙적으로 비공개 (사람에 대한 valuation이 폐쇄적이라는 점을 비판하는 스타트업들 - SNS 팔로워수나 포스팅 주기로 대체하자?)
- 중국의 social credit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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