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전 멸망한 도시인데 어디서 이렇게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것인지 궁금했다. 알고 보니 야생동물들이 들어왔다가 고철 사이에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고 죽는다고 했다. 오염된 고철들과 사체들이 쌓인,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음으로 끌어들이는 황폐한 유령도시. (48쪽)

더스트 시대에는 이타적인 사람들일수록 살아남기 어려웠어.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니까, 우리 부모나 조부모 세대중 선량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찾기 힘들겠지. 다들 조금씩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딛고 살아남았어. 그런데 그중에서도 나서서 남들을 짓밟았던 이들이 공헌자로 존경을 받고 있다고,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63쪽)

"아뇨. 지금은 아니에요. 생각해보면 저는 그냥 그애들이 미운 거지, 모든 사람들이 다 미운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세상이 다 끝나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이제 안 해요. 그애들이 지금도 싫지만요." (76쪽)

"식물들은 아주 잘 짜인 기계 같단다. 나도 예전에는 그걸 몰랐지. 나에게 오랜 시간에 걸쳐서 그걸 알려준 녀석이 있었거든." (79쪽)

레이첼은 식물이 될 수 없어서 기계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공학자 일라이저는 기계로부터 식물의 특성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그는 정말 식물처럼 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유연하고 자기 창조적(spontaneous)인 기계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이희수는 아영에게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 아영에게는 이희수가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이희수에게 아영은 자주 놀러 오는 동네 아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아영은 이희수가 아무 말 없이 가버린 것이 무척 서운했다. 그래도 한 번 정도는,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81쪽)

사람들은 디스어셈블러를 인류의 승리로 보고 있지만, 아영은 그런 찬사에 동의하기 힘들었다.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들이 지구 멸망 직전에 뒤늦게 수습한 게 뭐가 칭찬할 일이라고……. (95쪽)

자기가 저지른 일을 부랴부랴 수습하는 데 불과한 것을 왜 칭송하는지 모르겠다는 아영의 태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성이 있다는 말은 모두 죽어가는 저 바깥에서도 안전하다는 뜻이고,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우리 자매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판단은 절반 정도만 옳았다. 더스트는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 아마라도 그 망할 실험을 당하기 전까지는 괜찮았다. 대신 다른 것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더스트가 아닌, 그 밖의 모든 것들이. 그래도 우리가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내성종이 아닌 사람들, 그러면서도 어리고 약한 사람들은 더 많이 죽었다. 그 모든 것이, 나는 끔찍하게 싫었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모든 현실이. (128쪽)

“세상이 망해가는데, 어른들은 항상 쓸데없는 걸 우리한테 가르치려고 해."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왜 망해가는 세상에서 어른들은 굳이 학교 같은 것을 만든 걸까 생각해보았다.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대체로 하품을 하며 수업을 듣는 반면, 칠판 앞에 선 어른들은 늘 의욕에 가득차 있었다. 나는 이것이 어른들의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워야 해서 학교를 운영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행위 자체가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165쪽)

나는 더이상 피를 뽑히지 않아도 되어서, 매일 밤 긴장 상태로 잠들지 않아도 되어서 이곳에서의 삶이 좋았지만, 무엇보다 내게 주어진 일이 있어서 좋았다. 이 마을이 나를 꼭 필요로 해주는 것 같아서. 아마라는 잠들기 전에 가끔 나에게 속삭였다. "나오미, 우리 죽어도 여기서 죽자. 여길 떠나지 말자." 나는 언젠가 이곳을 떠나야만 하는 날을 자주 상상했지만, 아마라를 마음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168쪽)

아이들을 가르치는 어른들도 그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일을 통해 효용감을 채우는 것.

나는 하루와 대니가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함께 견딘 사이에 가까웠던 것이다. (175쪽)

그런 폐허를 걷다보면 아주 이상한 생각이 들어. 타인의 무덤을 파헤쳐서 이곳의 삶을 쌓아올리고 있다는 생각. 더스트 폴 이후로 세상은 예전보다도 더 모순으로 가득해진 것 같아. (186쪽)

그러나 원체 모든 삶은 타자의 죽음에 기반한다.

프림 빌리지는 거대한 기적이었지만, 기적이라는 말은 근원을 알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곳은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세워진 도피처였다. (204쪽)

"제조에 필요한 재료와 무게, 과정을 정확히 기록하는 것이 과학의 원칙이지. 하지만 이건 달라. 감추는 것이 널 구할 테니까. 지금은 그런 시대야, 원칙이 네 약점이 되고, 편법이 네 무기가 되지. 이 비참한 시대가 끝날 때까지는, 네 머릿속에 제조법이 완벽하게 들어가 있어야 해. 남이 볼 수 있는 기록은 절대 남기지 마. 아무리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숨기는 게 좋아." (221쪽)

"레이첼은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것뿐이야. 세상을 구할 의도도 없고,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도 아니지. 레이첼이 여기에 머무르는 건…… 그건 아마도, 이곳이 자신에게 가장 편안한 장소이기 때문일 거야."레이첼에 대해서 말할 때, 지수 씨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레이첼을 가깝게 여기는 것 같으면서도 조금은 냉소적인 태도가 묻어났다."자신이 원한다면, 레이첼은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도 있겠지. 정보도 있고 능력도 있는데다, 운도 따라줬으니까. 하지만 레이첼은 그걸 원하지 않아." (223쪽)

"돔 안의 사람들은 결코 인류를 위해 일하지 않을 거야. 타인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는 게 가능했던 사람들만이 돔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인류에게는 불행하게도, 오직 그런 이들이 최후의 인간으로 남았지. 우린 정해진 멸종의 길을 걷고 있어. 설령 돔 안의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더라도, 그런 인류가 만들 세계라곤 보지 않아도 뻔하지. 오래가진 못할 거야." (2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