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그런 유의 값싼 동정일까?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 '와, 오늘도 상쾌한 관극이었다~' 하고 나오는 관객은 없을 것 같았다. 나레이터와 함께 괴로워하고 찝찝한 기분으로 나오는 게 극의 의도 아닌가? '카불'에서 기뻐하는 관객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충격에 가깝지... 세계대전을 언급하기 시작하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도 그런 유의 값싼 동정일까?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 '와, 오늘도 상쾌한 관극이었다~' 하고 나오는 관객은 없을 것 같았다. 나레이터와 함께 괴로워하고 찝찝한 기분으로 나오는 게 극의 의도 아닌가? '카불'에서 기뻐하는 관객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충격에 가깝지... 세계대전을 언급하기 시작하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도 그런 유의 값싼 동정일까?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 '와, 오늘도 상쾌한 관극이었다~' 하고 나오는 관객은 없을 것 같았다. 나레이터와 함께 괴로워하고 찝찝한 기분으로 나오는 게 극의 의도 아닌가? '카불'에서 기뻐하는 관객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충격에 가깝지... 세계대전을 언급하기 시작하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일리아드>에서 "마치, 카불"이 너무 충격적이었다고 얘기했더니 룸메가 질색하며 오타쿠가 그런 거에 열광하는 게 싫다고 했다. 세월호 팬픽 읽고 우는 애들 같다고. <일리아드>도 그런 유의 값싼 동정일까?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 '와, 오늘도 상쾌한 관극이었다~' 하고 나오는 관객은 없을 것 같았다. 나레이터와 함께 괴로워하고 찝찝한 기분으로 나오는 게 극의 의도 아닌가? '카불'에서 기뻐하는 관객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충격에 가깝지... 세계대전을 언급하기 시작하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우리는 안전하게, 극장에서, 말 그대로 '신화화된' 전쟁의 재연을 '관람'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트로이 전쟁을 바라보는 올림푸스 신들과 다름없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에게 익숙한 전쟁이 들려오고, '영어하는 한국 병사들'과 같은 대사가 우리를 안락함에서 흔들어 깨우는 거다. 마지막에 관객을 향해 쏘는 조명이 말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고, 트로이의 멸망은 마치,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도 진행 중인 전쟁과 다를 바가 없다고.

그래서 미얀마를 넘어 카불까지 언급한 건 시대고발적이다. 안락하게 극장에서 우리의 비극을 구경하는 건 비겁하다고 고발한다. <일리아드>에 나레이터가 들어 온 이유, 특히 귭나레가 2차대전 후유증에 시달리는 베테랑으로 묘사되는 이유, 굳이 기원전 신화(로 편입된 전쟁)를 현대로 가져온 이유? 이건 반전(anti-war)극이니까! 원작자 노트에서도 그랬다, 이라크전 때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트로이 전쟁부터 모든 전쟁을 거쳐 온 '시인' 그리고 그 시인이 그리 말한다. 매번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었으면 한다, 달리 말해서 이번 전쟁이 마지막이었으면 한다! 그런데 인류사에서 전쟁은 끊이지 않으니 노래도 계속되는 거다.

그래서 <일리아드>는, 비록 그 작품명부터 그리스비극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지만, 단순한 불행 포르노, 전쟁 속에서 고통받는 피해자를 보며 연민을 느끼고, 그러면서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자기 자신에게 도취되는 감상의 자세를 지향하는 극은 아니라고 본다. 관객이 성숙한 자세로 극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애초에 연출의 의도는 '평범하고 선량한' 관객들에게 삿대질하며 네가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한 일들에 관심을 가지라고 울부짖는 것에 가깝다고 느꼈다.

나는 일리아드가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함과 동시에 그것을 덜 노골적으로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원전에서는 훨씬 더 잔인한 묘사가 많이 나오지만 (창이 혀뿌리를 자르자 날카로운 청동을 물고 먼지 속에 쓰러지고 어쩌고...) 전쟁사를 읊는 장면 자체는 건조하다.

(사실 이 모든 고민을 해결하려면 프로그램북을 읽어야겠지만 귀찮아서 고이 모셔두기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