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놓친 독서는 분명히 있다. 그것은 제일 첫번째 책장을 넘기는 순간 명백하다. 요컨대 어휘력의 한계나 문체의 벽에 부딪히기도 한다는 것이지만, 이번 경우에는 예감했던 바와 같이 서사의 문제였다. 좀 더 어렸을 적에 이 소설을 읽는 편이 나았다. 고입을 앞두고 있을 시절에 읽기 적합했을 것이고, 늦어도 고등학생 때 읽었어야 했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는데 독서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내가 이번 독서를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면 과거의 나를 치유하는 방향으로 접근해야 한다.
제1장
- 요제프 기벤라트는 '뛰어난 능력과 인물에 관한 끝없는 시기, 일반적이지 않거나 더 자유롭고 세련되고 지적인 것들'에 대해 '본능적인 적대감'을 느끼고, 그것은 '치졸한 질투심'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이는 '이 도시에 사는 다른 가장들과 비슷'하다. 이 도시에는 몇백 년 동안 인재가 없었는데도 뛰어난 인물을 시기한다. 비등비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질투하고 경멸하는 게 일반적인 특성이란 소리다. 아, 이런 통찰.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흔히 보던 광경이라서 더.
- '한스 기벤라트는 똑똑하고 재능 있는 소년이었다.' 잘생겼고, '진지한 눈빛과 총명해 보이는 이마, 당당한 걸음걸이'를 갖고 있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신비한 불꽃'의 기분을 안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건 초등학생 때 읽었어도 좋았을 테다.
- 모두한테 인정받는 인재한테는 한 가지 길밖에 없다.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나 교수가 되는 것. 나는 신앙이 죽어 가는, 혹은 이미 죽은 시대에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둘 중 하나만 제시받았다.
- 한스는 매일 오후 4시까지 수업을 받은 뒤 그리스어를 따로 배우고 오후 6시부터 라틴어와 종교학 복습을 하고 일주일에 두 번 저녁식사 후에 수학을 배우고 매일 아침 수업 시작 한 시간 전에 종교 의식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도 한 시간 내내 몰래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했다. 분명 충격적이어야 할 루틴인데 한국에서 흔히 보는 광경이라 '...그래서 뭐?' 같은 반응밖엔 안 나온다. 심드렁해진다. 헤세가 현대 한국의 입시를 보게 된다면 아직 살아서 돌아다니는 인간들이 경이로울 것이다.
- 난데없이 보티첼리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당황스러웠다. 보티첼리의 그림이 가느다랗다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뭐, 그래, 나른한 우아함.
- '플라이크 아저씨의 올바른 성품과 점잖은 태도를 존경했지만, 다른 종교관을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듣기가 거북했다.' 이런 경우 갖고 있던 존경심이 때로는 격렬한 경멸로 변모하더라.
- '한스는 반항심이 많고 누군가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에 무척 예민한 아이'라는 부분도 자꾸만 내 유년기를 연상시켜서 괴롭다. 타고난 기질이 남들보다 기민하고, 주변의 찬사에 익숙한 아이들이 보통 그렇다. 이때 제대로 된 사회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반사회적인 범죄자가 되거나 방안에만 틀어박혀 세상과 소통하려 들지 않는 폐인으로 자라는 거다. 뛰어날수록 실패하기 쉽다는 생각을 한다. 유년기의 편차는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면 사라지는데도 어릴 적에 받은 찬사를 잊지 못해 평범해진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현실과 괴리를 느끼는 사람들이 꽤 있단 말이지.
- 한스는 공부만 하는 생활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지만 한편으로는 주입받은 가치를 내재화해서 공부로부터 안도감과 행복을 찾는 것 같다. 공부가 괴로워도 그 과정에서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확신을 얻게 되고, 타인을 '내려다보게 될 것'이라는 상상을 통해 우월감에 도취되는 것 말이다. 재차 말하지만, 대한민국의 수험생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 괴팅겐의 다른 인재들에 대한 소식을 처음 접하고 주눅이 드는 모습을 보니까 고입 시절이 떠올랐다.
- 그리스어도 모르면서 한스를 윽박지르는 요제프를 보니 이것도 대한민국의 보호자들을 똑 닮지 않았나 싶고, 우리 아빠는 진짜로 나보다 잘할 것 같고.
- 시험에 떨어지면 '지금까지 무시해 왔던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는 한스의 모습을 보니까 대입 때 기억이 되살아나서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 2등을 했는데 소감으로 1등도 할 수 있었을 거라고 하는 대목에서 고등학생 때 참가했던 대회들이 생각났다. 도전하기 전에는 압박감 때문에 차라리 기권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하는데 막상 2등을 하고 나면, 아, 이렇게 잘할 줄 알았으면 1등을 노릴걸, 하게 된다. 근데 지금도 이렇게 살고 있는 걸 보니 답이 없다.
- 예상: 1등한 애 만나서 걔한테 말려들고 이리저리 휘둘리거나 삶에 회의감을 느끼고 망가지다가 자살할 것 같다(자살로 끝나는 거랑 남자애랑 키스한다는 것만 아는데 아마 이런 진행이 아닐까 싶음).
제2장
- 기차는 상실에 관한 모티프로 자주 사용되는 것 같다. 편도도 아닌데 왜 그런... 이라는 반발심이 들긴 하지만 어쨌든 크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동경을 자극하고,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인 소음을 내고, 정해진 길을 착실히 밟으며 나아간다는 점에서 강인한 이미지로 남는 게 아닐까 싶다. 그 멈출 수 없는, 때로는 무자비하기까지 한 관성 말이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기 전부터 아주 오랫동안 기차와 그 소설이 결부되어 있었는데, 그건 지금 할 얘기가 아니다.
- 물고기도 햇볕을 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