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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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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스의 갑옷을 입고 휘브리스에 사로잡힌 파트로클로스와 그의 뒤에 나타나 작은 입김으로 갑옷을 떨군 아폴론...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절규하는 아킬레스... 그리스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처럼 측면을 향하고 몸을 웅크리며 절규하는 연기가 인상깊었다.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헥토르를 연기하다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비틀거리며 "그는 좋은 사내잖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뱉는 나레. <나자>의 이 대목이 떠올랐다: 선량한 사람들이라고 했죠, 그래요, 전쟁에서 서로를 죽게 만드는 사람들처럼 선량하죠, 안 그런가요?

헥토르가 아킬레스의 이전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 둘의 대치 상황에서 아킬레스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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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스는... 자기 갑옷을 입은 파트로클로스를 죽이고 그것을 빼앗아 입은 헥토르를 죽임으로써... 파트로클로스와 함께 한 자신의 과거를... 죽여버린 거야... 인간 수도꼭지가 되어서 펑펑 울었다. 화자의 정체는 끝내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데 전쟁에서 소년병의 총구를 마주하고 서로 총을 내려놓은 뒤 나지막히 독일 가요를 부르기 시작했다는 회상이 짧게 스쳐 지나가는 걸로 유추해보건대 2차대전 참전군이 아니었을까? 해안에서 불타는 소년병들의 시체를 묘사하며 그들이 몇살이었고 어디서 왔는지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들려주는데 미국 지명이 언급되는 걸 보니 PTSD에 시달리는 베테랑이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조금씩 섞어가며 트로이 전쟁 얘길 들려주는 설정인 것 같다. 전쟁의 참상을 묘사하긴 싫다며 어차피 여러분도 다 알고 있잖아... 하고 인류사의 굵직한 전쟁들을 열거하기 시작함(혁명까지도). 중동전쟁도 언급되길래 어디까지 가나 싶었는데 미얀마! 외치고 끝내서... 나중에는 이 극에 더 많은 전쟁이 언급되겠구나 싶어 씁쓸했다.

헥토르의 시체 묘사가 아름다웠다. 나는 헥토르와 아킬레스의 대치 장면부터 프리아모스가 찾아와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간청하는 장면까지를 진짜 좋아한다... 헥토르의 검푸른 머리카락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가족들이 성벽 위에서 그 광경을 보며 오열하는 장면에서는 어떤 숭고함마저 느껴지지 않나.

마치 방금 전에 살해당한 듯 목덜미를 적시는 축축하고 따뜻한 붉은 피와 살결 냄새를 풍기는 부드러운 피부... 잠든 듯이 평온한 표정으로 죽어서도 아킬레스를 농락하는 헥토르... 분노는 아버지의 사랑 앞에 관용을 베풀고 전쟁의 끝엔 결코 치유되지 못할 상처를 안은 남자 둘만 남는다.

시원하게 오열하고 싶다. 까라마조프답게 막무가내로 울고 싶다. 이 비통함! 견딜 수 없는 연민! 정말 훌륭한 카타르시스의 표본이군요.

xx 파리스만 아니었더라도 우리 가정적이고 용맹하고 아름다운 사내 헥토르는 죽지 않았겠지(?) 고대 그리스의 세계관을 좋아한다. 신조차도 운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게 좋다. 세상은 이유 없이 잔인하거나 자비롭고, 인간은 신에게, 신은 운명에게 복종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