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ISBN 978-89-546-2203-5 03810

9쪽: 나는 꽤 오래 시 강좌를 들었다. 강의가 실망스러우면 죽여버리려고 했지만 다행히 꽤나 흥미로웠다. 강사는 여러 번 나를 웃겼고 내가 쓴 시를 두 번이나 칭찬했다. 그래서 살려주었다. 그때부터 덤으로 사는 인생인 줄은 여태 모르고 있겠지? 얼마 전에 읽은 그의 근작 시집은 실망스러웠다. 그때 그냥 묻어버릴걸 그랬나. 나 같은 천재적인 살인자도 살인을 그만두는데 그 정도 재능으로 여태 시를 쓰고 있다니. 뻔뻔하다.

12쪽: “정말 시를 배운 적이 없으세요?” 강사가 물었다. “배워야 하는 겁니까?” 내가 반문하자, 그는 “아닙니다. 잘못 배우면 오히려 문장을 버립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아,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하긴 시 말고도 인생에는 남에게 배울 수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지요.”

17쪽: 카그라스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뇌의 친밀감을 관장하는 부위에 이상이 생길 때 발생하는 질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가까운 사람을 알아보기는 하지만 더이상 친밀감을 느낄 수가 없게 된다. 예컨대 남편은 갑자기 아내를 의심한다. “내 마누라 얼굴을 하고 꼭 내 마누라처럼 구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야? 누가 시킨 거지?” 얼굴도 똑같고 하는 일도 똑같은데 아무래도 남처럼 느껴진다. 낯선 사람으로만 보인다. 결국 이 환자는 낯선 세계에 유배된 것과 같은 기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비슷한 얼굴의 타인들이 모두 함께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믿는다.

21쪽: 사냥용 지프에서 핏물이 떨어지면 사람들은 죽은 노루라도 실려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안에 시체가 있다고 가정하고 시작한다. 그쪽이 안전하다.

25쪽: 죽인 사람보다 참고 살려둔 사람이 더 많다. “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사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나.”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동의한다.

(33쪽: 나는 악마인가, 아니면 초인인가, 혹은 그 둘 다인가.) -> 중2병레전드

48쪽: 프랜시스 톰프슨이라는 자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고통 속에서 태어나 자신의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 나를 낳은 어머니, 당신 아들이 곧 죽어요. (‘아버지 살인’ 속에서 태어나 ‘공’ 속에서 죽어가는 살인자의 자아일지도)

48쪽: 은희는 마치 세상의 모든 일이 자기에세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고 행동한다. 네, 제가 거기에 있기는 하지요. 그리고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 날마다 어떤 일들이 일어나지요. 하지만 그것들은 저하고는 아무 상관 없고 저에게 별 영향을 주지 못해요, 라고 말하는 것 같다.

51쪽: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험한 욕을 한 일이 없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욕도 안 하니 자꾸 예수 믿느냐고 묻는다. 인간을 틀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신들의 그 앙상한 틀에 들어가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가늠조차 못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