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는 환갑잔치를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암 선고를 받고, 그때까지 그가 모아 온 자료와 지식이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도록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의 집필에 착수하게 되었다는 일화를 들려준다. “그 기간에 보통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글을 썼다. 한가로운 시간이면 갈등이 생겼고 갈등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미친 사람처럼 글쓰는 일에 몰두했던 것이다.” 마침 나의 영향으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을 뒤따라 읽기 시작해 나보다 먼저 완독한 친구가 있어 무척 신경 쓰이던 차에, 나이 예순에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일분일초를 아까워하며 일생일대의 과업에 매진했을 저자를 상상하며 큰 감명을 받고 나의 젊음을 허비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짐에서 그치고 말았다.)
- 광복과 한국전쟁 이후 쑥대밭이 된 서울을 계획적으로 재건할 수 있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건만, 책을 읽다 보면 그토록 가난했던 나라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 6.25 전란으로 전쟁 이전의 자료가 소실되고, 그때부터 5.15 군사쿠데타 이후까지의 자료는 ‘폐지수집운동’에 의해 ‘폐지’로 공출되었다는 대목에서 마음이 쓰렸다. 조선왕조실록의 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니.
- 대연각호텔 화재사건의 관계자들이 처벌받은 뒤로, 보존연한이 지나면 건축 도면을 파기하는 관례가 생겨 삼풍백화점의 설계와 준공검사 관계자는 문책되지 않았다.
- <6.25 사변 종합피해 조사표>의 <민간인 인명피해상황표>는 사망과 학살을 별도 집계하고 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대목이다. 저자는 한국전쟁이 끼친 인재 손실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도록 종로구에서 납치된 사람들의 수를 집계하는데, 서울대와 고려대 총장, 판검사, 변호사, 의사, 목사, 고위공직자 등, 전국의 변호사 총수가 백 명 남짓하던 시대에 종로구에서만 32명의 변호사가 납치되었다고 기술한다. 일제 때 외과수술로 유명했던 백인제가 친아우인 변호사 백붕제와 함께 납치되었다는 각주를 읽으며 개인의 기량은 시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감상이 들었다.
- 전후 한강을 건너 피난한 사람의 80%는, 공산정권의 실태를 알고 있는 광복 후 월남자들이었다.
- 리지웨이 중장이 한국인의 생존력을 찬양하며 미국인의 나약함을 지탄하는 기자회견이 그렇게 기만적일 수 없다.
- 정부가 국민들을 무상 노역에 동원시키고 사유지를 착취한 과정이 서울 도시 개발에 있어 불가피한 악행이었을 수는 있어도, 오늘날 서울의 인프라를 누리는 그 누구도 민간인의 희생을 기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다소 씁쓸하다.
- 1960년대까지의 한국인이 생각한 고층건물은 3-8층으로, 잦은 지진과 천황을 모시는 나라에서 100척이 넘는 건물은 불경하다는 일본의 사고에 영향을 받은 결과물이었다.
- 손정목은 김수근의 ‘그 강한 俗氣가 끝내 그를 예술가로 생각하게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 일제 강점기의 거물이었던 박흥식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이유는 총독부가 해당 제도가 결코 강요된 것이 아니며 ‘조선인 개개인의 충성심의 발로’라고 선전하기 위해서라고 추측된다. 정권이 바뀌어도 훌륭한 수완으로 살아남은 그를 보며 재기가 남다르다고 생각했다.
- 강남지구개발 조감도(1966.2.5)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축물의 높이가 너무 낮아 놀라웠다.
- 화신백화점이 있던 자리에 이병철의 딸 이명희가 제1주주로 있는 신세계백화점 종로점이 건설되고 있다, 는 대목을 읽으며 신세계백화점에서 자연스레 정용진을 연상했던 것이 틀렸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신세계백화점이 본래 삼성 소유였음을 모르고 있었다.
- <그림으로 본 한국의 도시>
- 르코르뷔지에의 ‘300만을 위한 오늘의 도시’와 박병주의 새서울 백지계획을 병치해 두고 그 유사점을 설명해주었는데, 도시계획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둘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 잘 모르겠다.
- 도시기본계획안에 대한 비판으로 ‘시간당 50mm의 비만 와도 온 시내가 물바다가 되는데 하수도망이나 제대로 갖추어라’라는 것은 오세훈이 서울시장으로 재직 중인 21세기에도 통용되는 듯…
- 8.15도시계획 전시에서 전시된 모형이 ‘간첩들이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파괴되었다는 게 신기했다.
- <세운상가 아파트 이야기>, <<건축>> 1994년 7월호
- 세운상가가 동서의 흐름을 남북으로 절단시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건물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가 없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손 선생이 세운상가에 대한 글을 탈고한 해는 1996년으로, 이후 30년 가까이 세운상가가 어떤 변화를 거쳐왔는지는 다른 책을 참고하여 알아봐야 할 듯하다.
- 한간 연안도로와 제방 사이에 공간이 생기면서 여의도에 택지를 조성하는 ‘한강개발 3개년계획’이 출범했다. 아무도 한강의 모양이 어떻게 바뀔지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 신기하다.